2009년 새해를 여는 BGM

No Problem - Duke Jordan

쪼가리 : 라캉 논쟁을 보며

모 처에서 라캉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심리학과 과학철학에 대한 전문적인 논의가 오가고 있지만 비전공자로서도 재미있는 구경거리[...]인지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보니 자꾸 의문이 생겨서 메모.

라캉의 이론이 (현 단계에서) 과학적인 엄밀함이 부족한 것에도 동의가 있고, 철학이 메타학문이라는 점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데, 그릇된 혹은 증명되지 않은 과학을 기반으로 한 메타논의가 잘못되었다는 얘기에 어째서 이렇게 논쟁이 불 붙는 것일까요?

이건 이를테면 "우주 어딘가에 이렇게 생긴 외계인이 있을 것이다"라는 불확실한 전제를 갖고서 그 외계인과 지구인의 차이를 비교해가며 인지철학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여기에 대해 "그런 외계인이 없다는 증거가 없다"라거나 "경험증거가 없다고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다"거나 "기존 과학의 잣대로만 판단할 일은 아니다"라는 반론까지 전개되는 상황.

그나마 이것은 라캉을 매우 호의적으로 해석한, 훗날 옳은 것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만든 비유입니다. 라캉의 이론 일부는 심리학계에서는 이미 과학적으로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하는데, 이 얘기가 정말 맞다면 위의 비유에 아래의 내용을 추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어떤 외계인의 존재를 주장한 학자가 "말머리 성운 쪽에서 그 문명의 전파를 수신했다!"고 주장했는데, 알고보니 그건 외계문명과는 아무 상관없는 전파였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외계인"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은 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이것을 과학적인 주장이라며 받아들여야만 할까요?

지금은 규모가 한참 커져서 "과학이 대체 무엇이냐?"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지켜보기 재미있긴 하지만 논의가 산으로 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 전공영역이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므로 얘기는 여기까지.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앞으로 지켜봐야겠지만 설득력 측면에서 저는 라캉을 부정하는 입장에 더 공감이 가고 있습니다.


덧 1. 기반이 된 과학 이론이 비과학적이어도 메타이론이 유의미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넌센스로군요. 라캉의 이론이 철학적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그 이론이 인간 정신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인간의 "정신"을 "분석"하는 학문이 "인간성"을 고찰하는 철학에 대하여 갖는 의미겠죠.

덧 2. 과학이 아니어도 철학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관념을 바탕으로 혼(魂)이니 백(魄)이니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철학을 할 수는 있죠. 실제로 영혼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건 아무도 확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령에 대한 각종 추측과 주장들을 과학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by 하늘빛마야 | 2008/03/18 08:52 | 누리그물 유희 | 트랙백(1) | 핑백(3)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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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과학에서 인증받지 못한 정신분석학이 철학..
덧글로 쓰려고 했는데 한정없이 길어져서 본문으로 씁니다. 하늘빛마야 님께 양해를 구합니다. 글 내용의 어떤 부분은 본문에서도 언급된 홍준기 선생님의 에서 따왔습니다. ------------------------------------------------------------------------------------------------------ 일단 님의 의문은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정신분석학을 분과.....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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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의 그 라캉 논쟁입니다. 제 글에 한윤형님의 답글이 붙어서 저도 응답하게 되었습니다. 쪼가리 : 라캉 논쟁을 보며 - by 하늘빛마야 ↓ 라캉 논쟁에 대한 생각 정리 - 한윤형 님 ↓ 위 글에 달린 덧글 ↓ 과학에서 인증받지 못한 정신분석학이 철학적 이론을 구성할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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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자체의 역량으로 온전히 자신을 규명할 수 없는 상태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직 탐구되지 않은 영역에서 인문적인 연구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 쪼가리 : 라캉 논쟁을 보며 - 하늘빛마야 ::: 라캉의 이론이 (현 단계에서) 과학적인 엄밀함이 부족한 것에도 동의가 있고, 철학이 메타학문이라는 점에서도 모두들 동의하는데 ... more

Commented by 마른미역 at 2008/03/18 11:45
저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D
애초에는 한의학과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말이지요. ^^;
Commented by 지오-나디르 at 2008/03/19 00:52
철학이요 종교이다.
Commented by 안단테 at 2008/03/19 06:39
한번 입장을 정하면 쉽게 바꾸는 게 어려운 듯... 어떻게든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 말이에요^^;;;
Commented by 윤형 at 2008/03/20 18:07
안녕하세요.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요. 님의 글을 읽어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제 견해를 약간 보강해 보려고 몇자 끄적입니다.


첫째, 좀 우스운 얘기지만 "기반이 된 과학 이론이 비과학적이도 메타이론이 유의미할 수"가 있습니다. 철학이 분과학문의 메타이론으로서 출현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며 당위이긴 한데, 과학은 과학대로 발달하고 철학은 철학대로 발달하면서 갭이 멀어지기도 했고, 도대체 어떤 것이 올바른 메타이론이냐는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일이 생깁니다.


가령 이런 예시를 들어볼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매우 종합적이고 일관성 있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어요. 물리학에 접근하는 방식과 철학에 접근하는 방식이 같다는 뜻이죠.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은 과학 혁명 이후 뉴튼 물리학에게 자리를 내줬고 그의 주장은 지금 잣대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의 물리학에 대한 메타 이론이었던 철학은 여전히 의미있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반대하는 학자도 많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 근거로 "물리학이 틀렸으니 그 메타 이론인 철학도 즐-"이라고 하고 있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칸트 철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칸트는 당대의 과학자인 뉴튼 등이 시공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개념을 자신이 정리해야 겠다고 결심했고, <순수이성비판>의 인식론에서 시공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의했습니다. 오늘날 그 시공간 개념이 물리학에서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그의 인식론까지 오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다른 근거로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죠.)


마찬가지로 라캉 역시 그 방법론이 분과학문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철학 영역에서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건 지나치게 앞서 나간 주장이에요. 과학적인 사람들에겐 좀 답답하긴 하겠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 이론이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해서 논의되느냐에 따라 인문학에서의 의미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라캉 이론이 인간 정신의 일부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잘 설명한다고 생각해요. 제 마음도 분석되고, 남의 마음도 분석되고, 그걸로 드라마 비평도 하고 영화 비평도 하고 그러는 걸요. 다만 문제는, 임상의 영역에서 (라캉을 포함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마음의 병을 고치는데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마도 어떤 이론이 마음의 구조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실험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병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거라는 사실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비록 병을 고친다는 것이 가장 강력한 잣대일지라도, 그 잣대가 그 자체로 전부는 아닌 만큼, 그것만으로 "라캉 이론은 마음에 대해 전혀 설명하고 있는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과하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셋째, 심리학이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정신분석학이 엉터리 방법으로 부여잡고 있다면 모를까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임상에 대해 크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양쪽 다 뚜렷한 해결지점을 찾지 못한 문제라면, 정신분석학을 비 과학적이라고 규탄하는 것만큼이나 과연 그 영역이 과학적 방법론이 통하는 영역인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과학적인 방법이 통하는데 괜히 정신분석학이 비과학적 방법을 붙들고 있는 건지, 아니면 과학적 방법론으로 해결하기가 힘들거나 과학적 방법론이 통하지 않는 지점이라서 정신분석학과 같은 시도도 나오는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죠. 둘중 어느 쪽이냐에 따라 정신분석학의 비과학성이란 것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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