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by Noname

사랑의 기술 - 6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문예출판사

소유와 거래가 아닌, 초월과 합일의 사랑.
참 근사한, 그런 만큼 퍽 진부한 이야기.


아, 안돼. 완전히 글러먹었다.

언제부턴가 나란 인간은 완전히 유물론에 젖어버렸습니다. 영혼이니 신성이니 믿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요, 이치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들도 죄 부정("의심"이 아닙니다)하게 된지 오래입니다. 이탈리아의 모 기호학자씨는 현대의 무신론이란 결국 물신론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비아냥거렸는데, 그 말에 크게 동의하면서도 별로 그것을 극복해야한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숭고에 젖어서 살 수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멋대로 "환상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라고 결론 지어버리는 나는 이미 고결한 영혼이 되긴 글러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책은 이제 체질에 안 받는군요.

[소유냐 존재냐] 이후 에리히 프롬의 책은 이번이 두번째인데, 이 아저씨 책은 아무래도 저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합일을 통한 초월을 추구하는 사랑이라… 참 근사한 얘기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게 별로 신선하게 다가오질 않습니다. 소위 "기독교적 사랑론"이라든가 "동양적 세계관"같은 것들이 뭉실뭉실 떠올라서 시큰둥하기만 하네요. 아주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는 아니지만, 제가 원체 신비주의를 거북스러워해서요. 다른 한편으로는 맑스주의를 끌어와 인간의 자기소외를 얘기하며 현대사회에서의 사랑의 위기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도 그냥 좋은 얘기로만 들릴 뿐 별다른 울림을 주질 않았습니다. 이 책이 나온지 어언 53년이 지난 오늘날, 세상은 현대문명 비판의 홍수 속에 빠져있거든요.

그건 에리히 프롬의 잘못이 아닙니다. 저자는 사랑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풀어놓으며 자신의 통찰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안 좋은 책이 아니에요(그랬다면 나온지 53년이나 지난 지금 제가 이 책을 읽고있진 않겠죠). 다만 에리히 프롬 아니어도 이런 얘기들은 접하기 어려운 것들이 아니기에 사상가로서 뭔가 정신이 번쩍 들만한 통찰을 보여주길 바란 독자의 하나로서 맥이 좀 빠졌을 뿐입니다. 그만큼 소외와 소유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편화되었다는 뜻이니, 어떤 의미로는 긍정적으로 보아도 좋을 부분이겠죠(뭐, 에리히 프롬만이 꺼낸 얘기는 아니었지만). 제 취향이 아니었을 뿐, 나쁘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 대한 통찰은 성질상 그의 철학이라고 봐야할 테지만, 또한 많은 부분을 정신분석학에 의존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쓰여진 지 이미 50년이 넘었고, 그 동안 심리학도 발전을 겪으며 많은 부분을 고치고 덧붙였을 텐데, 이 책은 과연 오늘날의 기준에서 봤을 때 얼마만큼이나 유효한 것일까요? 예전같으면 이런 부분에 크게 의문을 품지 않고 읽었겠지만, 전에 이글루스의 아이추판다 님(http://nullmodel.egloos.com)이 라캉주의와 관련하여 주고받은 언쟁을 구경한 뒤로는 도무지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이 책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은 과학적인 서술이라기보다는 저자 본인의 인생론에 가깝고 그 자체로 한번 읽어봄직은 합니다만, 에리히 프롬이 정신분석학자가 아니었으면 하는 말의 권위와 신뢰도가 많이 떨어졌을 것이 분명하기에 도무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네요. 그렇다고 제가 저걸 검증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냥 반신반의하며 책을 덮을 수밖에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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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안단테 2009/04/11 01:03 # 삭제 답글

    저도 나쁘게 표현하자면 허울 좋은 소리에 대해 갈수록 회의감이 커지고 있어 고민이에요. 분명 완벽한 신성이라거나 절대적인 정의라거나 숭고한 사랑이라거나 그런 게 실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섣불리 정면으로 부정할 수가 없는 게 그렇다면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을 시 "나에게 다른 대안은 있는가"하는 심정 때문에 더욱 망설여지더군요. 어차피 사람은 무언가 선택하고 살아가야 하며 몇 가지 기준을 세워야 하는 건 분명하니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보편가치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아낼 수 없다면 설령 그것이 그럴 만한 권위가 없는 실체라 하더라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참 난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 라캉주의와 관련된 논쟁은 저도 살짝 구경만 한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그 사조를 파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를 들자면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받은 에리히 프롬의 저서를 읽고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일반인 입장에서의 일반적인 영향을 생각해보자면 결국 하나의 도덕이나 종교 같은 안온의 기준에 지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라캉주의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라 열변을 토하신 분의 입장을 따르자면 좀 더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철인이나 학자가 아닌 사람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과학적인 잣대로 재보는 것보다도 실익이 떨어진다고 봐요.) 말하자면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하나도 찾지 못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여인의 일생을 옛 시선으로 바라보면 지고한 모성애라 찬양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전적인 가치체계에 약간 더 호소력 있는 문장과 사상가의 권위에 힘입어 안심하고 편입하게 되는, 그 정도의 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개인의 마음의 평화와 사회질서의 안녕이라는, 뻔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부수적인 효과가 따라오겠습니다만은, 요즘 같은 시대에 듣기 좋은 말씀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지도 의문이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논의는 절대 될 수 없겠지요. 언젠가 여호와가 세상창조했다는 게 부정되었더라도 기독교는 의미가 있을 수가 있고, 또 그 의미를 가지려면 그 속에서 현대적인 의미를 재창출해야 한다는 마야 님의 말씀처럼 저 속에서 어떤 기준의 씨앗 정도를 찾아낼 수 있을지언정 그 홀로 줄기를 만들고 가지를 나누고 꽃을 피워내는 건 힘들다고 생각해요.
  • 채찍 2009/05/05 03:00 # 삭제 답글

    1. 라깡이니, 데리다니, 지젝이니.. 실상 프랑스에선 거리의 찰학자죠. 그들의 이야기를 떠받드는 것은 미국 영문학계와 한국의 국문학계뿐일 겁니다.
    2. 사회학의 프랑크프루트 학파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를 결합한 분석틀을 사회학에 도입하였죠. 프롬은 그 일원입니다. 그러니 일각에서 '프로이트+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을 프롬에게 돌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죠. 개인적인 생각은 다른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보다 프롬이 이론적 응용에서 우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프롬은 개인과 사회의 공진화적 변화를 역설했는데, 사회 변화를 위한 기초적 틀로서 마르크스 이론을, 개인 변화의 기초적 이론틀로서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수용해 왔던 것이지요.
    3. 심리학이 그간 상당히 발달해왔지만,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으로서 발달해 오지 못했습니다. 다만 임상심리학은 발달해 온 것 같은데, 거기에 정신분석이 포함되지는 않은 것 같네요. 심리학으로서의 정신분석은 프로이트, 융, 프롬..끗-
    4. 개인적으로 그의 베스트셀러 중에 가장 프롬다운 책은 역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아닌가 합니다.
  • Noname 2009/05/05 17:15 #

    라캉이나 데리다가 그렇게 소외당하는 이들이었군요. 우리나라는 원체 인문학 한다하면 라캉이 필수과목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보이길래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프롬의 책은 제일 유명한 책인데도 유독 자유로부터의 도피만 여태 읽지 못했군요. 나중에 함 찾아봐야겠네요.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의 책들도 관심이 가긴 하는데, 읽어야 할 것과 읽으려고 마음먹은 것들이 한가득 쌓여있어서 언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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