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오남용의 한 사례 by No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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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예전에 동생이 나에게 이렇게 볼멘소리를 하더라.

"남자들은 여자들이 다이어트 하거나 이쁜 옷 입고다니는 게 지들 유혹하려고 그러는 건줄 알더라? 꼴값들이야, 아주."

남자로서 변명 한마디 할 법도 하지만 솔직히 저 얘기에는 내가 반박할 말이 없다. 그런 수컷들을 내 오죽 많이 봤어야 말이지.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그런 거 아니라고, 니들 사람 그렇게 쳐다보는 거 짜증난다고, 골백번을 얘기해도 알아들어먹질 않는다. 오히려 자기네 고집이 자연스러운 인간 성정이니 니들도 그 스탠다드에 맞추세요~하는 게 대부분이다. 위의 글을 보다보면 아래에 진화심리학을 들먹이는 이런 리플이 달려있는데,


뭐랄까 이성적인 사고나 호불호보다 본능적인 차원의 일이니까요. 레깅스가 몸매를 어떻게 드러내는지는 아시죠?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걸 자꾸 감정론으로 부인하려 하시니까 그런 거에요.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지는 모르지만 무의식중에 내재된 본능이 발현된 거죠. 페미분들이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떤다는 진화심리학에 따르면요.

여자가 자신을 꾸미는 이유는 절대로 남자를 유혹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자기만족 때문이라는 게 주인장분의 주장이잖아요. 그런데 정작 자신을 꾸미는 행위가 어째서 자기만족(=쾌감이라는 뇌의 보상)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되어있지 않아요. 제일 중요한게 그거인데도요. 그냥? 내가 그렇다는데 어쩔 거냐? 이런 걸 설명이라고 하시면 곤란하지요.

뭘 그리 숨기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뻔한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동일한 원리로, 여성이 자신을 유혹하려한다고 착각하는 수컷들을 꼴값에 진상이라고 여기는 여성들의 심리도 한번 진화심리학적으로 설명해봤으면 좋겠다. 치장에 대한 여성의 기호를 오로지 유전자의 작용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즉, 그네들의 주체적인 기호를 부정한다면) 여성들이 그런 남성들을 보면서 느끼는 혐오감 역시 설명 못할 이유가 없으리라.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도출되는 "과학적인 결론"에 따라 저런 진상 그만 떨면 세상이 참으로 평화로울 것이다.

아니 싫다잖아. 이유가 유전자건 뭐건 간에 자기 좋아서 입는 거지 당신들 눈요기 서비스하려고 입은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시라잖아. 그런데도 "훗, 아무리 튕겨도 너네가 그러는 건 수컷을 유혹하기 위해서야. 너희의 유전자가 그걸 증명하지!"라니, 저쯤 되면 부채도사가 따로 없다. 게다가 여성의 심리를 말하면서 정작 여성 자신들의 직접적인 진술은 깡그리 무시하는 데에서 일말의 모순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진화심리학의 이름으로 미륵의 관심법을 쓰는 것이 꼭 "사이언톨로지"나 "심령과학"의 수준이다.

사람의 기호란 얼마나 복잡다단한 것인가. 개인적인 경험과 문화적인 요구와 산업의 조건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 아닌가? 진화심리학으로 세상만사 인간사 다 설명할 수 있으면 우주가 얼마나 심플하겠냐마는, 인간 성정을 좌우하는 조건은 너무나도 많아서 한가지 원리로 설명하려고 섣불리 달려들면 안된다. 그런데 그걸 자기가 주워들은 이론 하나로 전부 설명하려고 한다. 아니, 거꾸로 자기가 내린 결론을 위해 이론을 억지로 꿰어맞춘다는 편이 옳으리라.

불쌍한 진화심리학. 저런 수준낮은 말싸움에 오용되자고 연구된 학문이 아닐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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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Moonseer 2009/06/06 19:53 # 답글


    ㅋㅋㅋㅋㅋ

    글도 재미있게 읽었고 만화도 잘 보고 갑니다.

    진화심리학 부분은 실로 오해라고 할 수 밖에 없네요. 애초에 저런 학문이 아닌데.;
  • Noname 2009/06/08 15:15 #

    게다가 어설프게 알면서 상대방에게 "과학적이 되라"며 훈수까지 두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합니다.
  • zhun 2009/06/06 22:12 # 삭제 답글

    짧은 소견이지만, 지금까지 접해본 바로는
    진화심리학이나 사회진화론 부류는 과학과 '과학교'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으로 보임.

    그나저나 외국인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첫 인상이 '미녀들의 나라'라고 하는데서도 나오듯이
    우리나라 사람들 미모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좀 과도하다고 보인다.
    홍콩만 해도 별로 안 이런거 같던데... 교환학생들도 마찬가지고...
    한국 특유의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 썩 유쾌하지는 않다.

    난 예쁘게 차려입은 사람들 보면 일단은 좋게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주체성 상실에 아이덴티티 결핍 같아 보여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더라..
  • zhun 2009/06/07 23:45 # 삭제

    덧) 여동생님의 지적 자체에 태클 거는 것은 아님. 매우 좋은 지적 해주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동생이 없다보니...)
  • Noname 2009/06/08 15:12 #

    좀 과하게 집착하는 면이 있긴 하지. 근데 어느 나라를 가나 여성이 패션에 목숨거는 것은 어느 정도 공통된 현상이라고 생각해. 다만 외국에서는 안 꾸미면 안 꾸미는가보다~하고 넘어가지만 우리나라는 여성이 안 꾸미면 여자가 되어서 왜 그러냐고 쪼아대니까 최저선만 높아진 거 아닐까? "한국 특유의 요인"이라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평균적으로 잘 꾸미고 다니지만, 반면에 자기 개성 살려가며 주체적으로 코디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 우리네 패션에 대한 세간의 중평.

    그런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여성의 패션은 남성을 "유혹"하는 기술이라기보다는 과하게 높은 스탠다드로서 한쪽 성에게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족쇄"에 가깝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공부 잘하는 것이 나쁠 이유는 없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좋은 성적을 강요하며 못하는 애들에게 눈치줘서 새벽까지 야자하도록 만드는 것이 폭압이 될 수 있듯이.
  • 취어생 2009/06/06 22:40 # 답글

    크로스로드 라는 잡지에서 전중환 교수님께 한번 문의드려 보심이 어떨까요. 개인적으로도 저 문제를 전중환 교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는..
  • Noname 2009/06/08 15:02 #

    ...왠지 그 분 시간만 빼앗는 결과가 될 것 같긴하지만.... 그래도 궁금하군요. :)
  • dhunter 2009/06/06 23:10 # 삭제 답글

    '너네같은 감정컨트롤도 안되는 즈질들에게 시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능...'은 진화심리학적으로도 여성에게는 유리한 전략이 될듯...
  • Noname 2009/06/08 15:01 #

    그리고 진화를 통해 훗날 남녀관계에 평화가 찾아오는 게로군요.
  • 안단테 2009/06/07 12:54 # 삭제 답글

    와우. 독선적인 착각이 정말 어처구니 없군요.
    '지식'을 저렇게 야만인이 곤봉 휘두르는 수준으로 오남용하는 걸 보면 한숨이 다 나옵니다.
    (...아래 과학적 지식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왜곡되는 모습이 위의 진화심리학 운운 허튼 소리의 생산을 잘 꼬집고 있군요.
    하기야 다윈의 진화론도 사회진화론을 통해 크게 악용된 선례가 있었는데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싶네요;;)
  • Noname 2009/06/08 14:59 #

    그나마 제대로 된 지식도 갖추지 못했다고 봐요. (저런 류의 주장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만) 내가 과학적이네 니들은 비과학적이네 과학과학 타령을 부르면서도 생전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레퍼런스를 제시하는 법이 없습니다.
  • 지나가던 2009/06/07 13:01 # 삭제 답글

    오죽이나 '너 보라고 입은거 아니다'라는 소리가 듣기 싫은 모양들입니다.
    여성이 자기만족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꾸민다고 한들, 그것은 불특정 다수의 남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유혹하고 싶은 상대 딱 한 명만을 위한 것인데 말이죠.
  • Noname 2009/06/08 14:57 #

    패션을 무슨 발정기 동물의 구애행위 쯤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미용실에서 자기 순서 기다리다가 여성 잡지를 딱 한번만 유심히 들춰봤어도 그런 생각일랑 싹 사라질 텐데 말이죠. 그 수많은 바리에이션의 상품들, 미시적으로는 디테일 하나하나에 집착하고 거시적으로는 끊임없이 트렌드가 바뀌고 순환하는 그 패션들이, 그게 뭔지 알아보지도 못할 남성들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라니?!
  • 지오-나디르 2009/06/08 10:30 # 답글

    자기만족이 성립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일부는 타인의 시선에도 있지 않을까.

    오로지 자기 미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거 나름대로 심각한 자뻑이 아닐 수 없는데.

    하긴 자기 몸을 이용하는 예술가들도 있긴 하군.
  • Noname 2009/06/08 14:52 #

    "타인의 시선"은 맞는데 그게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볼 순 없다. 남자들은 솔직히 치마만 짧으면 눈에 띄게 이상한 차림 아닌 한 패션에 신경 안 쓰잖아? 어쩜 헤어스타일 취향도 천편일률적으로 긴 생머리인지 몰라.

    둔해빠진 수컷 하나 유혹하자고 핸드백 하나, 구두 하나 고르는 데에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쏟아부을까. 패션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은 거의가 여성이고, 좀 더 일반론적으로 말하자면 남녀불문 "패션과 맵시를 아는 사람"을 의식한 행위라고 생각한다(남자의 8할은 이 범주에서 튕겨져나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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