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제5 도살장 - 커트 보네거트 by Noname

제5 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나의 점수 : ★★★★

대량 학살과 사라지지 않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
냉소하고 절망하면서도 외면할 수가 없다는 자기고백.


※ 경고 : 스포일러 배려가 전무합니다. 1968작 소설에 그런 게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빌리 필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중 한명입니다. 포로로 끌려가 수감 생활을 하다가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합니다.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검안사로서, 사업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그 후, 어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이 시간을 넘나들 수 있으며, 외계인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로 인해 딸로부터 멸시를 받으며 일에서도 은퇴해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의식이 랜덤하게 시간이동을 한다고 말하며, 소설 [제5 도살장]은 빌리의 의식을 따라 시간을 종횡무진 앞뒤로 넘나들며 2차대전의 참상과 드레스덴 폭격, 전후 그의 삶에 대한 얘기들을 조각조각 이어맞춥니다.

빌리 필그림은 정말 시간도약을 하고 외계인을 만난 것일까요? 아니면 그냥 정신착란에 빠진 걸까요? 소설은 확실히 답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전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술의 시점이 작가가 책을 출간한 때인 1968년을 기점으로 하고있다는 점(유독 76년에 빌리 필그림이 죽는 대목은 빌리로부터 전해 듣는 형식을 띠고 있죠), 빌리 필그림이 라디오 방송에서 외계인 얘기를 꺼내기 전에 그가 겪은 일들에서 외계행성 트랄파마도어의 모티브가 되는 경험들이 엿보인다는 점, 시간여행이 유년기의 극적인 공포경험 몇가지를 제외하면 44년 참전 이후에 집중된 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소설 안에서 분명히 확인되진 않았으니 확언은 힘들겠군요.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행하는 의식의 시간도약이 지닌 본질적인 측면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어느 쪽이 진실이든 빌리 필그림은 무력하고, 역사는 불가항력이며, 전쟁의 기억은 종전 후에도 집요하게(죽는 순간까지) 그를 파먹을 겁니다. 빌리는 1944년 독일군들을 피해다니던 중에 처음 시간도약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 때를 기점으로 빌리는 어느 시간을 살든 모든 시간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1944년 이후 그가 겪는 모든 전쟁의 참상들은 죽는 순간까지 과거로서 사라지거나 묻히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고를 당해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든, 아님 정말로 외계인에계 잡혀갔던 것이든.

또한 전쟁은 미래에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연합군의 폭격기가 소이탄으로 도시 하나를 월면처럼 짓뭉개버렸을 때에도 내세우는 이유는 있었습니다. 모두 이유가 있었고, 따라서 불가피했습니다. 앞으로도 전쟁엔 이유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불가피할 것입니다. 빌리는 트랄파마도어의 외계인들로부터 전쟁을 예방한다는 생각은 어리석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모든 시간을 볼 수 있다는 이 전지적인 외계인들은 빌리에게 이러한 삶의 지혜를 전하죠. "우리가 전쟁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냥 전쟁을 보지 않을 뿐이오. 무시해버리는 거지. 우리는 영원토록 즐거운 순간들만 보며 지내요." 빌리 역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원토록 즐거운 순간들만 보며 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아무것도 상처입지 않았다"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불가피한 일이었소." 럼퍼드가 빌리에게 말했다. 드레스덴 폭격을 두고 한 말이었다.
"압니다." 빌리가 말했다.
"전쟁이란 그런 거요."
"압니다. 전 불평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상은 지옥이었겠소?"
"그랬지요." 빌리 필그림이 말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시오."
"이해합니다."
"선생은 심정이 착잡했겠소? 거기 지상에서 말이오."
"상관없었습니다." 빌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모두들 자신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나는 그것을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웠습니다."


커트 보네거트, [제5 도살장], 아이필드, 2005(1968). 231~232쪽.

커트 보네거트는 드레스덴 폭격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독일군과 전쟁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는 분노할 적도 연민할 피해자도 없이 다만 "그렇게 가는" 사람들로만 그득합니다. 그들은 어쩌다보니 독일에서 전쟁을 치르게 됐고 어쩌다보니 죽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막을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죽음은 슬프기보다는 부조리합니다. 모든 것은 합당한 범주에서 벗어나 있고, 그 상황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작가가 던지는 것은 냉소적인 블랙조크 뿐입니다, "그렇게 가는 거지".

그러나 체념과 냉소 안에 머물 것 같으면 [제5 도살장]이라는 책은 나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명작이 되거나 돈벌이가 될 줄 알았다며 위악적인 자기고백을 하고 있지만, 그는 보편적으로 돈벌이가 됨직한 빌리 필그림의 비극적이고도 감동적인 일대기로 페이지를 채우는 대신에 그의 부조리한 의식을 좇아나갑니다. 그리고 메타픽션적인 장치를 통해 그가 겪는 비극의 현장에 자신을 동석시킵니다. 빌리 필그림은 2차대전에 참전했고 드레스덴을 겪었습니다. 그의 뒷편에는 작가도 있었습니다. 필그림이 겪는 부조리함은 작가 자신이 받은 충격이며, 그건 같은 경험을 공유했던 제 3의 "빌리 필그림"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나는 모텔 방에서 기드온 성서를 뒤져 대규모 파괴 이야기들을 찾아보았다.

롯이 소알에 들어가자 대지 위로 해가 솟았다. 그때 주께서 손수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퍼부으시어 그 도시들과 모든 들과 도시의 모든 주민과 땅에 돋아난 푸성귀까지 모조리 엎어 멸하셨다.

그렇게 가는 거지.
다 알다시피, 두 도시의 주민들은 사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없어지자 세상은 더 나아졌다.
물론, 롯의 아내는 그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집이 있는 곳을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았고, 나는 그 때문에 그녀가 마음에 든다. 얼마나 인간적인 행동인가.
그리하여 그녀는 소금기둥이 되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

인간은 뒤돌아보면 안 된다. 나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이제 전쟁 소설은 끝마쳤다. 다음번 책은 즐거운 작품이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실패작이며, 그럴 수밖에 없다. 소금기둥으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들어보라.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짹짹?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 아이필드, 2005(1968). 34~35쪽.

[제5 도살장]은 드레스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모든 전쟁과 학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저질러지는 무수히 많은 죽음을 열거하며 작가는 세상만사에 초월한 듯이 생명은 원래 그렇게 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부조리한 것이라고 시종일관 조소를 날립니다. 전 냉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역자 말마따나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얘기밖에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커트 보네거트의 얘기는 거북스럽기 이전에 안타깝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초월했을 것 같으면 그 모든 "그렇게 가는" 죽음을 일일이 추적하고 기릴 이유가 없습니다. 초월은 트랄파마도어인이나 가능하지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제5 도살장]은 대량학살의 기억에서 벗어나지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을 끊임없이 되삼킬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 아닐까요.

이 작품은 아주 짧고 뒤죽박죽이고 귀에 거슬려요, 샘. 대량 학살에 대해 말할 만한 지능을 갖춘 존재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으니, 다시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어떤 것을 원할 수가 없지요. 대량 학살 뒤에는 모든 것이 조용하게 마련이고, 언제나 그렇지요. 새들만 빼고요.
그럼 새들은 뭐라고 할까요? 대량 학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뿐입니다.

"짹짹?"

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 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늘 가르친다.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 아이필드, 2005(1968). 30~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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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지오-나디르 2009/07/04 22:44 # 답글

    좋군. 그냥 자네 평만 보고 넘어가야지.(음?!)
  • Noname 2009/07/06 12:02 #

    그러지 말고 함 보게나. 재미있더라.
  • intherye 2009/07/05 00:10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이 책을 읽고 반해서 작가의 국내 출간물(+미출간물)을 다 찾아읽다시피 했습니다.
    (이 책에 견줄만한 책이 약간 있고, 몇몇은 기대에 좀 못 미치고 그렇더군요. ㅡ,.ㅡ)

    그리고 해리슨 버거론이라는 짧은 작품으로부터 받았던 강렬한 충격을 잊지 못하여 그런 충격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외부로부터 느끼기 어렵다면 스스로 만들어내보고라도 싶은 욕망을 좇으면서/참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워낙 짧은 거라 검색해보면 누군가가 타자 쳐서 올려놓은 게 있을 거에용.
  • Noname 2009/07/06 12:01 #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블로깅을 멈추셔서 많이 아쉬웠는데....
    저도 커트 보네거트는 이 소설이 처음인데, 다른 작품들도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추천해주신 단편은 조만간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 漁夫 2009/07/05 00:43 # 답글

    다 아시겠지만 Kurt Vonnegut는 드레스덴 공습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 목격담이 'The making of the atomic bomb'(by R. Rhodes)에 나와 있죠. 소설이 국내에 번역된 줄은 모르고 있었네요..
  • Noname 2009/07/06 11:59 #

    직접 경험한 것은 알았지만 목격담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검색해보니 번역되어 정발되었던데,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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