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문학소녀와 죽고 싶은 광대 - 노무라 미즈키 by Noname

문학소녀와 죽고 싶은 광대 - 6점
노무라 미즈키 지음, 최고은 옮김, 타케오카 미호 그림/학산문화사(만화)

[인간실격]의 질척질척한 패러디.
이야기를 뽑아내는 솜씨가 재치있다.


제목부터 "문학소녀"이길래 소설 패러디가 나올 거라고 짐작하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설마 그 대상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일 줄이야. 안 그래도 원작부터가 거무칙칙한 소설인데 거기에다 질척질척한 치정극을 뒤섞어서 이건 무슨 아스팔트 뻘탕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놨습니다. 정신이 병든 인간들이 떼로 등장해서 한바탕 난동을 부립니다. 빌려준 친구 말마따나 아침 드라마가 무색해지는 진창같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원작의 어레인지를 상당히 재치있게 해놔서 재미있게 읽었네요.

이야기를 먹고사는(말 그대로 책을 씹어먹습니다) 문학소녀라니, 라노베다운 캐릭터 메이킹이다 싶으면서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퍽 의미심장하게 읽을 수도 있는 설정이군요. 이 소설이 [인간실격]을 읽은 "독자"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그런 느낌을 줍니다. 줄거리는 이야기 뒤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나가는 의사추리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독자와 문학작품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문예부 부장 토오코와 그 후배인 주인공 코노하는 어느날 다케다라는 후배로부터 슈지선배를 좋아해 고백을 하고싶지만 글 실력이 없어서 그러니 연애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케다의 연애사업을 돕던 코노하는 어느날 다케다의 상태가 이상함을 깨닫습니다. 다케다는 슈지선배가 고민이 있는 것 같다며 슈지선배의 편지를 코노하와 토오코에게 건넵니다. 그들이 건네받은 편지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패러디한 자기고백이 담겨있었고, 사태를 심상치 않게 여긴 토오코와 코노하는 이 일에 개입하게 됩니다.

토오코와 코노하는 홈즈와 왓슨이 되어 자기들 앞에 놓인 미스테리를 파헤쳐나갑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제대로 된 추리극이 아닙니다. 토오코는 확고한 근거를 바탕으로 진상을 추론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소설 [인간실격]을 연결시켜가며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상상"함으로써 진상을 밝히고 갈등을 해결합니다. 추리로서는 말도 안되는 방식이지만, 이야기가 시종일관 [인간실격]에서 시작해 [인간실격]으로 끝을 맺는 탓에 전개가 의외로 무리없이 받아들여집니다. 추리는 외면적인 형식이고, 그 실질은 작품에 의한 재인식과 감정의 카타르시스라는 문학의 소통방식을 의사추리극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 재인식과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는 "탐정"은 "이야기를 먹는" "문학소녀"이고요. 은유가 재미있네요.

이런 부분를 떠나서, [문학소녀와 죽고 싶은 광대]는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었습니다. 엄청 정교하다고 할 수준은 아니지만 복선과 반전이 재치있게 짜여 있어서 읽는 맛이 좋았습니다. 인물도 탐정인 토오코나 대놓고 츤데레인 고토부키 등에게서 만화적인 도식이 보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캐릭터들이 납득가능한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다만, 일본 추리물들의 일반적인 특색인데, 아무리 궁지에 몰리고 진실이 밝혀졌기로서니 왜 자기 사정 자기 속내를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주절주절 다 떠벌리고 앉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일종의 장르법칙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긴 했습니다만.

뭐, 푸는 사람은 문제의 내막을 몰라야 추리극이 성립할 테니 모든 것이 밝혀지는 결말부에 가서야 얘기 못한 부분을 줄줄이 떠들게 되는 거지 싶긴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할 텐데, 그래도 좀 더 처리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특히 다케다의 사정은 막판에 너무 한꺼번에 풀어지는 감이 있는데, 이야기 중간중간에 분산시켜 밑밥을 던졌다가 마지막에 하나로 엮으면서 뒷통수를 딱 때렸으면 좋았겠다 싶네요. 작가가 아닌지라 방법론은 잘 모르겠지만 여튼 독자로서는 그런 아쉬움이 좀 남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변주해낸 질척질척하면서도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라노베가 주는 부담스러운 면은 상대적으로 적고 이야기가 스마트하게 잘 짜여있어서 제법 읽을만했습니다. 아쉬운 점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 간만에 유감없이 본 물건이었습니다(애초에 소설은 그리 즐겨 보지 않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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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문학소녀 시리즈 2009/07/31 16:25 #

    완결까지 다 읽었습니다. 시리즈 전반에 걸친 특징은 1권 감상(링크)에서 얘기한 것 정도면 충분할 것 같으니 나머지 시리즈는 각 권의 단평으로 대신해도 될 것 같군요. 사실 책 감상이라는 것이 엔간해서는 관심가지 않는 타입의 글인지라 써도 별 의미가 없긴 합니다만, 뭐든 남겨놓지 않으면 읽은 기분이 안 나서 이렇게 억지로라도 정리하게 되네요. 스포일에 대한 배려는 전무합니다. 스포일 신경쓰시는 분들은 읽지 말고 패스. 문학...... more

덧글

  • 종소리 2009/07/23 23:04 # 삭제 답글

    그 거북한 이야기를 모토로 변주해내었다니 더욱 구미가 당기는군요! 미라지에서도 적은 것처럼 최근 제가 추구하는(?) 라노베의 미덕이 전부 담겨 있는 작품 같네요~ 일단 1, 2권 주문완료! 후후, 빠른 시일 내에 읽고 불평(퍽)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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