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를 칼로 자르지도 않았소." by Noname

우리가 당연히 의심하리라 생각한 그는 서가로 달려가 [스토더드 강연집] 제 1권을 들고 왔다.

"자, 보시오!" 그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이건 진짜 인쇄물이란 말이오. 내가 속았어요. 이 집 주인은 벨라스코 같은 존재요. 이건 대단한 위업이오. 기가 막힌 철저함! 놀라운 리얼리즘이오! 그만둘 때를 알고, 페이지를 칼로 자르지도 않았소. 헌데 여긴 왜 들어온 거요? 찾는 것이라도 있소?"

그는 나에게서 책을 잡아채더니 하나라도 빠지면 서가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투덜거리며 급히 서가에 다시 꽂아놓았다.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반석출판사, 2005(1925). 73쪽.

원서와 세트로 반 값에 싸게 판다길래 질러서 보고 있습니다.

위 대목을 읽으면서 문득 전에 보았던 Paper knife에 관한 포스트(링크)가 떠오르더군요. 저 글을 안 봤더라면 전 아마 페이지를 칼로 자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을 겁니다. 스토더드 강연집은 대체 어떤 책일까요? 벨라스코는 정교한 무대 장치로 유명한 연극감독이라는데, 그가 연출한 무대가 대체 어땠길래? 그 밖에도 이해 못하고 넘어간 대목이 많을 겁니다, 뭘 모르고 넘어갔는지도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읽다보니 새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떠올랐습니다. 읽은지 하도 오래 되어서(게다가 어릴 때여서) 내용은 거의 대부분 기억도 안 나지만, 어째서인지 주인공의 선배가 [위대한 개츠비]를 굉장히 좋아했다는 사실만은 금세 떠오르더군요. [위대한 개츠비]를 보지 않은 채로 [상실의 시대]를 읽은 저는, 정말 그 소설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여담이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톰 뷰캐넌과 데이지의 모습에서 그 선배(검색해보니 이름이 나가사와라고 하는군요)와 애인의 관계도 문득 떠올랐고요. 뭐, 이건 책을 더 읽다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만요. 아니, 그 이전에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어서 기억을 되살려야 할 테지만.

대체 한 권의 책을 읽기 위해 얼마나 다른 무수한 글을 또 읽어야할까-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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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2009/09/18 13:04 #

    위대한 개츠비 (한글판 + 영문판)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화승 옮김 / 반석출판사 나의 점수 : ★★★★ 넘어설 수 없는 태생에 관한, 쓸쓸하고도 적막한 이야기. 사랑 이야기라는 사실 외에는 줄거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읽어나갔습니다. 좀 의외였습니다, 이렇게 순정적인 이야기였을 줄이야. 데이지를 만날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는 개츠비의 모습은 이 소설이 제시하는 근본적인 비극과 깊이 맞닿아 있어서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 more

덧글

  • JOHN_DOE 2009/08/06 21:52 # 답글

    오오 합쳐서 5천원도 안되는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싼건 좋은데 배송료 때문에 또 다른건 사야한다 하-

    상실의 시대로 읽어보셨으면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시 나온걸 읽어보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동 작가의 신작이 막 번역되어 예약판매 중입니다
  • Noname 2009/08/06 22:01 #

    아, 노르웨이의 숲의 새 번역판이 있었군요. 저야말로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안단테 2009/08/07 09:48 # 삭제 답글

    ...저도 링크해주신 글을 통해 페이지를 칼로 자른다는 게 뭔지 처음 알았네요. 서론을 읽어나갈 때는 "제본 참 엉망이구나"하고 Judson 씨의 분노에 공감했는데, 다 읽고 나니 글쓴이의 주장처럼 북 나이프로 미지의 영역을 답사하며 읽어나가는 것 또한 낭만적으로 느껴져 괜찮게 보이는군요. 역시 세상은 어떤 창을 통해 보느냐에 따라 180도 변하는 듯... 좋은 소개 감사드려요~!
    (어흑, 저는 지금 읽고 있는 <교양>만 해도 제가 얼마나 교양이 없는지 실감 중···
    진짜 어느 작품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섭렵해야 할 서적들이 산더미네요;;;)
  • Noname 2009/08/09 15:12 #

    한장 한장 열어가며 읽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저도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 zhun 2009/08/08 22:44 # 삭제 답글

    그저 이상한 번역이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저런 문화적인 배경이....
    옛날 소설들을 이해하려면 정말 다양하게 알아야 하는 것 같다.
    물론 20세기 초만 해도 지금과는 매우 다른 교육을 했던 것 같으니....
    그런데, 저걸 연구하고 번역해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은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서 좀 세심한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만...
  • Noname 2009/08/09 15:16 #

    나도 저거 미리 안 봤더라면 생판 이해 못하고 넘어갔겠지 싶더라. 게다가 상징적인 측면에서도 저 안 잘린 페이지들은 꽤 시사하는 바가 있는 요소고. 이야기를 읽는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어.
  • 언럭키즈 2009/08/24 19:05 # 답글

    마담 보바리를 읽고 있는데, 주인공의 방을 묘사하면서 '페이지를 자르지도 않은 의학사전'에 대해 스치듯 언급하더군요. 아마 이 포스팅을 안 읽었으면 무슨 소리인가 하고 그냥 넘겼을 것 같네요.
    사실 60페이지 읽은 와중에도 뭔소리인지 제대로 모르고 넘어 간 부분이 원체 많아서 19세기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이 소설을 전혀 다르게 읽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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