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교양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들녘(코기토) 친절하고 위트있는 지식의 종합선물세트. 친숙하면서도 얄팍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
이 책은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알아야지"싶은 내용들을 역사, 문학, 미술, 음악, 사상 등 분야별로 긁어모아 하나로 엮은 병문안의 과일바구니 같은 책입니다. 이런 부류의 책들은 서점 가면 널려있지요. 대학 초년생을 위한 교양 서적부터 취업준비생을 위한 시사 모음집까지.
지식을 통으로 전해주겠다고 나서는 이런 책들은 십중팔구,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보는 동안 짜증나고 보고 나서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요약문만 몇 줄 뽑아 하나의 책에 마구잡이로 구겨넣은 탓에 막상 책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없는 탓입니다. 주제가 없으니 내용은 정리가 안 되고 피상적이 되며, 그 결과 설렁설렁 읽기엔 화두가 복잡하고 막상 파려면 팔 게 없어 독자를 항구적인 불만에 빠뜨립니다. 그런 책들에서 우리가 얻어낼만한 정보는 참고문헌 목록과 인명 인덱스 정도입니다.
이 책 또한 기능적으로 같은 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교양 그 자체가 아닙니다. 책 한 권으로 교양인이 될 것 같으면 아무도 고생 안 하죠. 결국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잡다한 추천 목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여타의 잡탕찌개와 구별되는 한가지 분명한 장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이 책이 설정하는 목표입니다. 이 책에는 교양의 내용이 되는 지식들 만큼이나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 비중 있게 제시됩니다. 교양을 전하기 위해 저자는 "교양"이 대관절 무엇이며, 왜 그걸 익혀야 하는지를 논합니다. 그로써 이 책은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그에게 있어 교양이란 소통을 위한 양식입니다. 역사를 통해 과거와 소통하고 앎을 통해 문명과 소통하며 문화를 통해 인류와 소통하고 매너를 통해 세계와 소통합니다.
이는 "대학 새내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혹은 "지식의 세계로 초대"한다는 둥 막연히 좋아보이는 모호한 이유들과는 차별화되는 목표입니다. 인간은 문명으로부터 괴리되지 않기 위해 자신과 문명 사이에 교양이라는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하나의 경향은 특정한 사상에서 특정한 예술사조로, 여성의 자의식과 민족 정체성의 발현으로 연쇄됩니다. 그 기반으로 인해 세상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교양을 익히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전하는 교양의 내용들은 각 분야가 컨텍스트로서 긴밀하게 엮이게 됩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 두 차례의 혁명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서, 겉으로 보기엔 절대 변하지 않을 듯이 보이는 일상의 세계도 인간의 발 아래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왕이 바뀔 뿐만 아니라, 헌법도 개정된다. 계절뿐만 아니라 파종하고 추수하며, 요리하고 이동하며, 거주하고 난방하는 기술도 변한다. 심지어는 풍경도 변한다. 그때까지는 수천 년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풍경까지도 변하고, 이리하여 일상의 세계도 바뀐다.
인간은 시간 자체를 느끼게 되었고, 유년기는 독특한 경험의 공간으로 밝혀지며, 폐허와 무너진 성벽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즉 시간의 가속화 체험에 응답하며 나타난 것이 낭만주의의 예술혁명이다. 포괄적인 역사 개념은 낭만주의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정치에도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있듯이, 역사 역시 이중으로 사용된다. 발전과 개선으로, 기술과 정치영역에서는 혁명으로,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약으로 간주되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상실, 권위의 붕괴, 허무, 향수,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향한 동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청춘의 직접성, 가까움과 유년기 체험의 감각적 친밀성, 한마디로 말해서 괴테가 '소박한 것'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런 것은 후자에 속한다. 이러한 동경에 응답하여 박물관이 생겨났다. 박물관에는 모든 시대가 동시에 존재한다. 박물관에서 우리는 역사를 예술의 형태로 숭배한다.
디트리히 슈바니츠, [교양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들녘, 2001(1999). 422쪽.
교양에 맥락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환기시킴으로써 이 책은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면서도 마구잡이 잡탕찌개가 아닌 유기적인 책으로 자연스레 읽힙니다. 거기에는 물론 한계도 있습니다. 컨텍스트를 따르는 서술은 필연적으로 취사선택을 불러일으킵니다. 분량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소쉬르에서 촘스키로 이어지는 언어학의 발전이나 영미철학의 경향 등이 거의 언급되지 않은 점은 이런 부류의 책으로서는 좀 특이해보입니다. 그 밖에도 사회학이나 경제학 등의 주목할만한 발견 상당수가 언급도 되지 않고 넘어간 것도 있고, 맑시즘은 저자가 이에 대해 비판적인 탓에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하를 당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취사선택(차별?)이 흠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지식과 문화에 맥락을 부여하는 것은 인류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립하는 것과 같습니다. 관점이 정립될 때 비로소 지식은 연속된 변화와 발전의 한 과정으로서 오늘날에도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일 테죠. 그것이 없다면 이런 포괄적인 '교양서'는 쓸데없는 말들로 부피만 불린 홈쇼핑 카탈로그에 불과하게 될 겁니다. 독일 위주라든가 서양 위주라는 얘기 역시 동일한 이유로 극복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관점에 절대적인 공정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착각이나 미련만 품지 않는다면, 디트리히 슈바니츠가 제시하는 교양은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관점에 기반하고 있는, 지식과 문화 습득에 대한 유익한 가이드라인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양에 대한 그의 뚜렷한 관점은, 제시되는 지식을 유기적으로 엮어주는 기능 외에 책에 읽는 맛을 내는 데에도 톡톡히 몫을 하고 있니다. 그는 교양을 소통의 기반으로 여기기에 독자들과 친근하게 소통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합니다. 역사를 말할 때는 끊임없이 현재와의 유기성을 환기시켜 흥미를 유도하고, 현대 연극을 소개할 때는 극의 형식으로, 미술을 소개할 때는 큐레이터가 되어 현대미술을 개관합니다. 교양인의 양식을 설명하는 챕터는 위트와 풍자가 가득합니다. 특히 그는 교양의 이름 하에 소통을 가로막는 허위의식들을 향해서 날리는 일장 조롱은 씹는 맛이 유쾌합니다. 이것 때문에 이 책이 실은 교양의 개념을 부정하는 책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이 책을 오독한 것이고, 저자의 의도는 허위의식이 아닌 올바른 교양을 세우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인에 대한 자학적인 관점이 좀 걸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특히 서구 각국의 국민성을 논하는 부분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챕터의 내용들은 설명이 상당히 유형적이고 도식적이어서 기술된 내용들이 정말로 맞는지는 의심스러워지는 구석이 있습니다만, 그 챕터의 내용을 통해 한가지, 나치가 독일인들에게 남긴 트라우마 만큼은 확실하게 읽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역사의 죄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한 고통이겠지요. 과오를 후회하고 반성하는 민족은 있어도 자신들을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민족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다만 슈바니츠 씨는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보이므로(잊자는 뜻은 아닌 듯) 이 부분은 일부 자기낮춤의 위악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읽을만했습니다. 두께가 주는 부담감이나 저자의 교양과 지성에 대한 다소 고압적인 태도가 잡기에 부담을 주지만 막상 읽어보니 유쾌하게 잘 씹히는 책입니다. 설명 친절하고, 적당히 농담도 칠 줄 알고, 흐름도 잘 잡고. 이 분 왠지 강의를 잘 할 것같은 느낌이 드네요. 책이랑 강의는 다를지도 모르지만(아니, 애초에 이젠 현세에서 들을 수가 없게 됐지만). 여튼, 재미있고 실용적인 물건입니다. 저자의 권위에 매몰되지만 않는다면 교양에 대한 개괄서로서 건질 것이 쏠쏠한 책입니다.







덧글
안단테 2009/08/11 00:11 # 삭제 답글
처음 저자도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지식의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등대의 불빛 기능을 수행하는 점, 그리고 식자로서 갖춰야 할 태도, 혹은 경계해야 할 태도에 대해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잡아주는 부분은 참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열폭에 가까운 불만을 갖자면 거창한 제목에 비해 동양 쪽의 사상이나 역사는 싹 무시된 점이라 할 수 있겠으나 애초에 서양인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며 또한 실질적으로 책 안의 표현처럼 '유럽의 세계화'가 이루어진 지금 무리하게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열등감 표출에 지나지 않겠지요. 저도 튼실한 지식의 가이드라인으로서 잡아볼 만한 책이라 생각하며 특히 2부는 진국이라고 봅니다-_-b
Noname 2009/08/11 15:41 #
네. 애초에 독일인을 상대로 쓰인 책이니 그 점을 고려하며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