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대한민국 이야기 - 이영훈 by Noname

대한민국 이야기 - 4점
이영훈 지음/기파랑(기파랑에크리)

뉴라이트의 관점을 간단히 엿볼 수 있는 책.
주목할만한 대목이 제법 있지만 문제 역시 많다.


이영훈 교수의 책입니다. 네, 뉴라이트로 유명한 그 사람입니다. 이영훈 교수는 근현대사 부문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비판하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을 내면서 유명해졌는데, [대한민국 이야기]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의 내용을 대중강연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즉 뉴라이트가 근현대사에 관하여 전하고 싶어하는,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핵심이 담긴 텍스트인 셈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세간의 평과 달리 뉴라이트의 식민지 시대 인식은, 적어도 이영훈 교수의 주장만 놓고 볼 때는 친일적이라고 하기엔 맥락이 복잡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흔히 문제시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경우, 그의 주장은 수탈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수탈은 분명 있었지만 그 수단으로서 근대화가 수반 되었다"입니다. 이에 대해 김기협 교수는 "연 3.5%가 제로 베이스에서 산업화를 시작한 조선의 입장에서 큰 성장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비판을 하는데, 조선이 그간 줄곧 저개발 상태였고 크게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리 유효한 반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근대화라는 것은 단순히 산업의 규모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구조나 제도적인 면을 포괄하는 것인데, 근대적인 재산법 체제가 일제의 조선민사령을 통해 비로소 도입된 사실 등 근대적 경제구조를 사회에 이식하는 데에 일제 통치가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고 식민지배가 아니었으면 조선은 영원히 미개했을 거라든가 하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식민통치가 근대화의 유일한 수단은 아니지만 어쨌든 식민지배가 근대화의 진척에 결과적으로 일조한 측면은 있다는 얘기입니다. 위안부 문제나 친일파 문제도 괜찮다 나쁘다의 차원이 아닌 이런 식의 복잡한 맥락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뉴라이트의 식민지 시대 인식에 대해서 문제삼지만, 그 이면을 파고 보면 이견은 있되 상당부분 수긍하거나 합리적으로 따져볼 수 있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주장이 옳냐 그르냐는 별론으로 하고, 친일파니 매국노니 무턱대고 몰아붙일 차원의 소리를 하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의의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다는 소리냐...면 그건 아닙니다. 실은 여기서부터가 본론인데, 이 책에서 이영훈 교수가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현실을 복합적인 맥락에서 읽는 비판적인 시선이 저자의 정치성향에 따라 지나치게 선택적으로 발휘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러한 수령체제에 대한 비판에 소극적입니다. 오히려 친화적인 면까지 보이기도 하지요. 왜 그럴까요. 민족주의인 이상 서로 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래서 어떤 현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보십시오.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의 원칙이 명확히 제시되지도 않은 채, 남북한의 정상이 서로 껴안고 있는 사진을 몇 번이나 보여주면서, 마치 통일이 임박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2007. 46~47쪽.

위의 대목을 보면, 대북 유화정책의 이면에 깔린 국제평화주의, 복잡한 국제 정치역학, 실향민과 이산가족에 대한 인도주의, 국내정치적인 문제 등 온갖 요소들은 증발해버린 채 대북유화는 어느새 공공의 적 "민족주의" 하나로 치환됩니다. 그나마도 그에게 민족주의는 "수령체제에 친화적"인 특정부류를 가리키는 말로 좁혀지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는 민족주의를 전부 그런 부류로 싸잡아 매도하고 있습니다. 무려, 친일파라는 매도에 대해 나 억울하다며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는 책에서 말이죠.

아래의 인용구는 저자가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뛰어남을 칭송하는 챕터의 말미에 덧붙인 문구입니다. [대한민국 이야기]라는 책에서도 가장 당혹스러운 소리들 중 하나입니다.


1954년 7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미국도 원래 식민지 탄압에 신음했다. 미국의 독립은 타국의 영토와 민족을 지배하던 낡은 제국주의를 근멸시키고 수만 리 밖의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키는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은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세계 모든 국가와 국민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한국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그간 미국의 도움에 감사함과 아울러 우리도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앙양(昻揚)해 갈 것을 확언하는 바이다.
저는 이 메시지에서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지를 더없이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초대 대통령의 진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이를 두고 약소국이 강대국에 바치는 외교적인 비사(卑辭)라 치부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독립과 자유에 대한 신종선서(信從宣誓)와 같습니다.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2007. 220쪽.

대한민국 헌법은 서구의 헌법을 롤모델로 삼아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어디 내놓아도 크게 꿇릴 것 없는 텍스트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이 정말 제헌헌법이 말하는 그런 나라였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고, 좌우 불문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현실적으로는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헌법이 추구하는 이상의 발뒷꿈치도 못 따라가는 나라였습니다.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 선생은 이승만의 횡포에 맞서 다른 무엇도 아닌 "문장도 좋지만 그 뜻이 너무나 좋"은 대한민국 헌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습니까?

자유 민주주의가 그렇게 중요한 가치라면(전 여기엔 동의합니다) 이승만이야말로 "딛고 올라서야 하는" 한계이며, 이는 현행헌법에서도 4.19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전문(前文)의 문구로 명시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서는 느닷없이 이승만이 자유 민주주의의 투사가 됩니다. 그는 이승만의 입장을 현실적이라는 식으로 변호를 하는데, 그가 현실주의적인 정치감각에서 독재를 하면 했지, 헌정을 무시하고 정치깡패를 동원하고 정적을 간첩으로 몰아 숙청하는 사람에게 자유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니, 이게 뭔 헛소리인지.

아래의 대목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국사에서 적잖은 잘못이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학살 등, 진상을 규명해야 할 반인륜 범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국사에 대한 비판이 사회의 정치적 통합으로서 국가를 보다 높은 문명으로 발전시키려는 선의를 넘어 건국사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적 도전으로 나타날 때는, 그리고 그것이 한두 개인의 학문적 소신을 넘어 잘 조직된 정치세력의 힘으로 과시될 요량이라면, 그러한 비판의 자유가 끝까지 보호되어야 할 헌법적 가치인지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니다. 강정구의 주장에 실정법상의 문제가 있다고 하여 검찰이 그를 구속코자 하였을 때 법무부 장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발동하여 막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대한민국이 잠시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건국사의 기본 줄기가 크게 흔들렸지요.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2007년. 282~283쪽

그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가 건국사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적 도전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 나라에 불만있는 부류야 어디든 있는 법이죠.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한두 개인의 학문적 소신을 넘어 잘 조직된 정치세력의 힘으로 과시되고 있다고 하네요. 흠,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좀 무섭군요. 누군가가 대한민국을 전복시킬 역적모의라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예시로 드는 것이 강정구 교수의 불구속수사를 지시한 건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수준의 역적모의입니다. 수사는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예컨대 도주 우려가 있다든가) 불구속이 원칙이라는 '법치주의적'이고 '자유민주적'인 관점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이러한 편향성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자신들을 "뉴라이트"라고 지칭한다는 사실에서 이미 뻔히 드러나고 있으므로 새삼 논할 필요가 없겠죠. 식민지 시대를 향하는 그의 비판적인 시선은 충분히 흥미롭습니다. 타당성에 대한 보다 상세한 검토는, 아직 제겐 벅찬 일이기도 하고 여기서 자세히 다룰 문제도 아닌 것 같으니 넘어갑니다. 어쨌든 논해볼만한 관점을 제시하고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해방 전까지의 얘기. 해방 이후로 넘어오면서 이영훈 교수는 사학자로서의 공정성을 크게 잃어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그로 전락하고 맙니다.

안병직 교수와 함께 뉴라이트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영훈 교수의 근현대사 인식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입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나 정치적인 발언 등에서 요상한 소리가 많이 나와 크게 반발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생각해볼만한 문제를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제기하는 책입니다. 해방 이후에 관한 대목과 정치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적당히 필터링한다면 색다른 관점으로서 들어볼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물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지만요. 애초에 뉴라이트 문제제기의 근원이 되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도, 이영훈 교수가 얘기한 식의 내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보다보니 어째 공정하게 해석했을 것 같지가 않아서요. 아무래도 관련 논의들을 더 읽어봐야 온전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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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안단테 2009/09/25 20:12 # 삭제 답글

    인터넷 등지에서 뉴라이트의 평가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매도적인 부분이 많아 그들의 사상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딱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군요. 음, 사실 단편적으로 접한 이들의 주장 중에는 분명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이 있었으나, (좀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어떤 목적'으로 나왔는지도 중요하기에 잘 알아보고 신중히 판단하고 싶었는데 적절한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 Noname 2009/09/27 20:55 #

    사실 뉴라이트는 하는 얘기들에 비하면 부당하게 매도당하는 측면이 있죠. 그러나 세간에서 해방 이후에 대한 어긋난 관점 때문에 차라리 배척당하는 것이 다행이다 싶기도 한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 언럭키즈 2009/09/25 21:28 # 답글

    "역시 뉴라이트는 재밌어!"
    라고 외치고 싶달까, 여러가지로 흥미롭군요.
  • Noname 2009/09/27 20:47 #

    기묘한 이중성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해방 이전에 관한 서술만 따로 놓고 보면 나름대로 괜찮은데...
  • zhun 2009/09/26 03:01 # 삭제 답글

    아 다 읽으셨군.
    나도 해방 전까지는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잘 읽다가
    해방 이후부터는 좀 고개를 갸우뚱 했던 책.
    원래 이 분 성향이 국가주의이신데다가
    '잘못된 국가관을 바로잡는 것이 지식인의 소명'이라고 여기는 분이니 뭐...

    근데 재밌는 건 이분 스승님이 우리나라 실증경제학파의 거의 시초 격인 안병직 교수인데
    두 분 다 한 때 맑시즘 쪽 연구를 하셨다는 것.... 안병직 교수는 미,일 식민지 예속론을 주장했다고 하고
    이영훈 교수는 석사논문이 모택동 소농주의 연구 였다나....

    수량경제사로 본 조선후기라는 책을 보면 실증경제학 관점에서 조선후기를 보는 관점이 잘 보임.
    '실증'의 진수 같다는 느낌과 동시에 사실은 약간 '정해진 결론' 같다는 느낌도 들고....
    건조한 책이지만 훑어볼만 하더라.
  • Noname 2009/09/27 20:46 #

    건조한 책이라면 그쪽은 제법 읽을만할 것 같네.

    안병직 교수의 책이야 안 봤으니 모르겠다만, 이영훈 교수의 해방 이후에 대한 관점은 주사파들 만큼이나 제멋대로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시대에 관한 서술에서 수긍하고 나름대로의 괜찮아지던 이미지가 뒤로 가니 훅 날아가버렸다. 전에 썼던 "개과천선 컴플렉스"의 표본같은 사람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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