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한참 세상이 시끄러울 때, 가족끼리 TV를 보다가 아버지께서 거칠게 한마디 하셨다. 저런 놈들은 주저 없이 처단해야 하는 거 아니냐, 취했다고 형 감경이 말이 되느냐, 판사들이 성범죄를 우습게 안다 등,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 거기에 대해 나는 법원도 가능한 형량 안에서 나름대로 복잡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형벌의 인플레이션은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 쉽다, 형 감경의 타당성은 지금 알려진 정보로는 결론짓기 어렵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 중 동생(역시 법대생)도 여기에 동의하는 뜻을 표했고, 결국 아버지는 이 한마디를 하시며 고개를 가로 저으셨다.
- "어쩜 법률 한다는 사람은 한결같이 답답한 소리만 한다냐."
나에 대한 얘기지만 반쯤은 동감.
절차는 위법하지만 법률은 유효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심히 당혹스러웠지만 그 황당함은 이내 식어버렸다. 어떤 식으로 저 결론을 내놨을 지 얼추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이오공감 오른 노정태 씨 글 보면서도 그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경향으로 보건대 다른 문제 같았으면 훨씬 격하게 흥분했을 사람이라고 본다. 그러나 전공이 전공인지라 헌재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이내 파악된 듯하다. 법학이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부분은 참 편하다. 사람을 빨리 냉각시킨다. 덕분에 황당하진 않다. 다만 속이 쓰릴 뿐이다.
새삼 거론되고 있는 행정수도 특별법에 대한 헌재 판결도,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황당한 판결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헌재의 판결문을 직접 본 바로는 그렇게 마냥 엉터리는 아니다(이 사안은 언젠가 자세히 얘기해볼까 한다). 헌법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판결이긴 하지만, 비판하는 글들을 살펴보면 세간의 "그딴 게 어딨냐"와는 접근하는 방향부터가 아주 다르다. 헌재의 결론이 옳다는 소리가 아니다. 정치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드는 이유가 완전히 억지는 아니라는 소리다. 사실 그래서 더 얄미운 면도 있지만.
판결을 안 내릴 거라면 헌재가 무슨 소용이냐,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스스로 선언한 거라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사실 헌재로서 손대기 힘들겠다는 생각은 든다. 당장에 눈에 밟히는 것은 민주적 정당성 문제. 대통령이 3명, 대법원장이 3명, 국회에서 3명 뽑아놓은 헌재는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과는 이 부분에 있어서 게임이 안 된다. 이건 파워를 논하기 이전에 정당성부터가 도마에 올라버린다. 그러므로 원칙대로라면 헌재는 의회가 하는 일에는 되도록이면 개입을 자제하는 것이 정답이다. 법률의 심판에 대해서도 "헌재가 대체 뭐라고 국민의 대표들이 내린 결정을 무효로 만드냐"는 비판이 나오는 마당에 국회 내부의 의사절차에 손을 댄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웬만큼 가시화되지 않는 이상은 힘들겠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점에서 이미, 문제는 이래저래 복잡해진다. 헌법재판소는 한 명의 솔로몬이 아니라 9명의 판사로 구성되어 있다.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면 문제는 판단에서 논쟁이 되고, 논쟁이 되면 더이상 누군가의 현명한 식견과 정의로운 결단 수준에서 문제를 매듭질 수가 없게 된다. 본격적으로 검토할 것도 아니면서 끌어와서 좀 미안한 감은 있지만, 예시를 위해 잠시 노정태 씨의 글에서 한 대목을 뽑아보겠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은 무효화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국민의 대표라고 해도 정해진 규칙과 절차를 지킬 때 대표로서의 권한도 정당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국회는 기능부터가 대의기관인 데다가 의원의 선출도 직접하는 만큼(의회는 민주적 정당성의 화신이라고 보면 된다) 절차 위반이 곧장 무효로 귀결되는 것은 금물일 것이다. 다소의 유도리는 필요하겠지. 하지만 유도리에도 선은 있는 법이다. 나는 이번 사안이 그 선을 넘어버린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디, 무효가 되길 바랐다. 허나 결과는 이 꼴. 그러나 헌재의 결론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다만, 속이 쓰리다.
- "어쩜 법률 한다는 사람은 한결같이 답답한 소리만 한다냐."
나에 대한 얘기지만 반쯤은 동감.
절차는 위법하지만 법률은 유효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심히 당혹스러웠지만 그 황당함은 이내 식어버렸다. 어떤 식으로 저 결론을 내놨을 지 얼추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이오공감 오른 노정태 씨 글 보면서도 그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경향으로 보건대 다른 문제 같았으면 훨씬 격하게 흥분했을 사람이라고 본다. 그러나 전공이 전공인지라 헌재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이내 파악된 듯하다. 법학이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부분은 참 편하다. 사람을 빨리 냉각시킨다. 덕분에 황당하진 않다. 다만 속이 쓰릴 뿐이다.
새삼 거론되고 있는 행정수도 특별법에 대한 헌재 판결도,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황당한 판결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헌재의 판결문을 직접 본 바로는 그렇게 마냥 엉터리는 아니다(이 사안은 언젠가 자세히 얘기해볼까 한다). 헌법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판결이긴 하지만, 비판하는 글들을 살펴보면 세간의 "그딴 게 어딨냐"와는 접근하는 방향부터가 아주 다르다. 헌재의 결론이 옳다는 소리가 아니다. 정치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드는 이유가 완전히 억지는 아니라는 소리다. 사실 그래서 더 얄미운 면도 있지만.
판결을 안 내릴 거라면 헌재가 무슨 소용이냐,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스스로 선언한 거라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사실 헌재로서 손대기 힘들겠다는 생각은 든다. 당장에 눈에 밟히는 것은 민주적 정당성 문제. 대통령이 3명, 대법원장이 3명, 국회에서 3명 뽑아놓은 헌재는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과는 이 부분에 있어서 게임이 안 된다. 이건 파워를 논하기 이전에 정당성부터가 도마에 올라버린다. 그러므로 원칙대로라면 헌재는 의회가 하는 일에는 되도록이면 개입을 자제하는 것이 정답이다. 법률의 심판에 대해서도 "헌재가 대체 뭐라고 국민의 대표들이 내린 결정을 무효로 만드냐"는 비판이 나오는 마당에 국회 내부의 의사절차에 손을 댄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웬만큼 가시화되지 않는 이상은 힘들겠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점에서 이미, 문제는 이래저래 복잡해진다. 헌법재판소는 한 명의 솔로몬이 아니라 9명의 판사로 구성되어 있다.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면 문제는 판단에서 논쟁이 되고, 논쟁이 되면 더이상 누군가의 현명한 식견과 정의로운 결단 수준에서 문제를 매듭질 수가 없게 된다. 본격적으로 검토할 것도 아니면서 끌어와서 좀 미안한 감은 있지만, 예시를 위해 잠시 노정태 씨의 글에서 한 대목을 뽑아보겠다.
청와대가 미디어법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한나라당은 그 뜻을 받들어 밀어붙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사법부는 입법부의 권한을 침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무효로 판결했어야 한다.얼핏 듣기엔 그럴싸해보이는 말이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자. 청와대가 미디어법을 요구하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국회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정한다면 그건 이미 국회의 뜻인 거 아닌가? 위 글은 주어를 "한나라당"으로 놓고 있지만, 정확히는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 이 사건의 주체다. 용역깡패들이 국회로 쳐들어와서 대리투표한 거 아니다. 그런다고 이 사안이 적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헌재가 이 사안에 무효를 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논쟁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은 무효화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국민의 대표라고 해도 정해진 규칙과 절차를 지킬 때 대표로서의 권한도 정당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국회는 기능부터가 대의기관인 데다가 의원의 선출도 직접하는 만큼(의회는 민주적 정당성의 화신이라고 보면 된다) 절차 위반이 곧장 무효로 귀결되는 것은 금물일 것이다. 다소의 유도리는 필요하겠지. 하지만 유도리에도 선은 있는 법이다. 나는 이번 사안이 그 선을 넘어버린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디, 무효가 되길 바랐다. 허나 결과는 이 꼴. 그러나 헌재의 결론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다만, 속이 쓰리다.





덧글
검은달빛 2009/10/29 22:46 # 답글
Noname 님의 이 포스트와 비슷한 얘기를 애인 님께 하다가 스스로도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을 느꼈던 1인으로써 엄청나게 공감하고 갑니다 ;ㄴ;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공감하고 있어요. 법학도란 어려워요..
Noname 2009/10/29 23:24 #
법학도는 공부하다보면 자연히 보수화된다는 얘기가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검은달빛 2009/10/30 00:32 #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사시생들이 준비해야 할 거대 판례가 또 하나 생긴 거네요. 왠지 주변 사시생 친구들에게 '/애도' 문자를 날려야 할 것 같은 이 기분.. ㅇㅁㅇ;;
타누키 2009/10/29 23:51 # 답글
잘봤습니다~
Noname 2009/11/02 11:45 #
감사합니다. :)
위시 2009/10/29 23:56 # 답글
공부하던 도중에 아는 꼬꼬마가 비분강개하는 문자를 받았었는데, "과거 결정을 그대로 반복한 것 같다. 일단 결정문을 봐야 알 것 같구나" 하고 진정시키는 문자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냈습니다. 결정요지는 헌재 홈페이지 가서 봤는데, 이해는 가더군요. 개인적으로 파악하고 있던 이념스펙트럼이 좀 빗나간 것 같아서 일견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다만 뉴스 접하고 이 생각은 들더라구요. 내가 형사소송법 전공해서 이런 상황에 내놓을 수 있는 답이 뭐일까... 하고.
헌법재판소장만이라도 선거로 뽑았다면 이런 결정은 나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국회에서 3인을 보내는 마당에 그 3인이 국회를 향해 적극적이기는 더더욱 어렵겠지요.
Noname 2009/11/02 11:47 #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또다른 고려사항이 있다....그런 식으로 보게 되다보니 점점 '내 관점'이라는 것이 약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오-나디르 2009/10/30 02:17 # 답글
잘 봤음.
Noname 2009/11/02 11:48 #
땡스.
와일드체리 2009/10/30 04:45 # 답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일견 수긍도 되고, 공부도 되는 군요. 꾸벅~
Noname 2009/11/02 11:48 #
감사합니다. :)
노랑잠수함 2009/10/30 05:26 # 답글
잘 읽었습니다.결국...
화는 나지만 이해는 한다... 정도로 요약되겠군요.
오늘 라디오 토크 프로그램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그 절차에 있다.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을 정당하다고 하면 민주주의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결국 흔한 비유대로 "성공한 쿠데타" 이야기겠죠.
자주 듣는 라디오 토론프로그램에서 한나라당 소속 한 분은 이런 말도 하시더군요.
"민주적 절차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국회에서 싸우고 어쩌고 하면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지 못하고 처리한 일들이 많다. 그 모두를 부정할 셈이냐?"
Noname 2009/11/02 11:53 #
네. 사실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절차위법=결과위법"이라는 등식은 일견 당연해보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온전히 관철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헌재라는 기관 자체가 지닌 정당성 문제가 겹치면 정말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헌재가 저걸 빠꾸먹이는 게 과연 옳은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장기적으로 보아 더 해가 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연안갈매기 2009/10/30 08:13 # 삭제 답글
법학도로서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긴 어려운 일
Noname 2009/11/02 11:53 #
그저 속만 타죠.
쿠라사다 2009/10/30 10:15 # 답글
잘 봤습니다. 역시 법은 쉽지 않네요.
Noname 2009/11/02 11:53 #
정당성이라는 게 일면적이지 않아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홍홍 2009/10/30 11:20 # 답글
문제는 이런 헌재가 행정수도때는 사법적극주의를 발휘했다는거죠.
Noname 2009/11/02 11:57 #
정치적인 역학이 아주 개입되지 않은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행정수도 건이나 이번 판결이나, 헌재는 늘 나름의 명분을 세우고 있고, 명분이 서 있는 이상 헌재의 결론은 "잘못된 판단"이 아닌 "다른 관점"이 되어버려서 따지기가 어렵게 됩니다.
koei777 2009/10/30 13:49 # 답글
어제 이같은 결과를 들었을때 저또한 분노가 치밀었지만국민이 뽑은 국회의 결정에 개입할수 없다라는 예길 들어보니 이해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국민이 국민의 대표를 잘 선택해야 하는 거겠죠.
이런일을 볼때마다 내년 내후년 있을 선거.. 반드시 올바른 한표를 행사해야 겠다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주변사람들에게 반드시.. 올바른 한표를 행사하라는 예기도 꼭 꼭 할껍니다... ;;
그리고.. 정말 올바른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면 ... 당연히 이런법안.. 국회에서 무효화 시키겠죠..
Noname 2009/11/02 11:58 #
네. 민주주의는 결국 선거에서 결판을 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blue ribbon 2009/10/30 16:54 # 답글
헌재가 헌법을 어기다니.이건 무슨 상황이죠?
절차가 헌법에 명시되어있더라.
Noname 2009/11/02 12:03 #
그렇게 보기에는 다소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습니다.